[민들레 칼럼]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처지의 미국 중앙은행
조회 : 662 / 등록일 : 23-04-17 10:53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처지의 미국 중앙은행
이태경 /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수행 중인 Fed의 근심을 더하는 건 다름 아닌 유가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非)OPEC 주요 산유국 협의체인 OPEC 플러스(+)가 전격적인 추가감산 발표를 한 이후 국제유가는 계속 오르고 있다. 지난 3월 17일 배럴 당 66.74달러(이 가격은 유가가 10년래 최고점을 찍었던 2022년 3월 11일 123.70달러의 거의 절반에 해당)까지 떨어졌던 서부텍사스산원유(WTI)의 경우 4월 12일 배럴 당 83.26달러까지 치솟았다. 두바이유와 북해산 브렌트유도 가격 흐름이 서부텍사스산원유와 유사하다. 지난 3월 24일 배럴당 74.10달러까지 떨어졌던 두바이유는 4월 12일 86.35까지 올랐고, 3월 17일 배럴 당 72.97달러까지 떨어졌던 북해산브렌트유는 4월 12일 87.33달러까지 상승했다. 문제는 물가안정에 절대적이라 할 유가의 안정을 미국이 효과적으로 강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R의 공포
인플레이션과의 전쟁만으로도 힘에 겨운 연준에게 새로운 도전이 대두됐다. 바로 경기침체(recession)의 내습(來襲)이다. 한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膾炙)되던 'no landing'(경기침체를 동반하지 않는 물가안정)은 이제 흔적조차 희미하다. 이젠 Fed조차 경기침체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Fed가 12일(현지시간) 내놓은 지난달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 정례회의 의사록을 보면, 연준 이코노미스트들은 FOMC 위원들을 대상으로 한 프리젠테이션에서 "최근 은행권 불안의 경제적 영향을 고려하면 올해 말부터 완만한 침체(mild recession)가 나타날 것"이라고 밝히며 미국이 침체기에서 벗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년으로 전망했다고 한다.
비록 연준이 완만한 침체(mild recession)라는 순화된 표현을 사용하긴 했지만, 침체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이 처음이라는 점, 미국 경제가 침체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2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기간까지 특정했다는 점은 시장에 충격과 공포를 안기기에 충분하다.
건재한 인플레이션과 밀려오는 리세션 사이에 낀 Fed
Fed가 경기침체까지 언급한 마당이니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강력했던 Fed의 기준금리 인상 드라이브는 조만간 멈출 가능성이 높다. 이른바 연준 피벗(통화정책의 방향을 긴축에서 완화로 변경하는 것)을 자나깨나 기다리던 자산시장은 모처럼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Fed를 비롯한 미국 경제, 세계경제가 직면한 상황은 정말 녹록치가 않다. 인플레이션이 건재한 가운데 경기침체가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은행시스템의 불안은 차치(且置)하고라도 말이다. Fed 입장에서는 인플레이션을 생각하면 기준금리를 내리기가 쉽지 않고, 경기침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통화정책을 완화적으로 가져가는 것이 맞다. Fed로선 진퇴양난의 처지인데 Fed더러 경기침체도 막으면서 인플레이션도 잡으라는 주문은 네모난 원을 그리라는 주문처럼 허황된 말이다.
벌써 만 2년 가량 지속되고 있는 인플레이션이 확실히 부러지기 위해서는 강력한 경기침체가 와야 한다. 이제 관건은 격렬하지만 짧은 경기침체가 와서 인플레이션이 조속히 진정되고 경기가 다시 확장국면으로 진입할 수 있을지 여부다. 최악의 상황은 경기침체가 오랜 기간 마일드하게 진행되면서 인플레이션은 고통스러울만큼 느리게 떨어지는 경우다. 그게 바로 저성장과 고물가가 동시에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이다. 성장률과 물가 중 어떤 것이 더 빨리 추락할지를 예의주시할 때다.